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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과 권정생 그리고 간디

 

사람과 사람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을 어렵기도 하거니와 위험하기도 하다. 나름대로의 추종자들(?)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2005년에 도법스님이 생명평화행진을 하면서 안동의 권정생선생을 찾아간 얘기를 신문에서 보면서 참 씁쓸했던 경험이 있다. 두 분 사이의 대화는 계속 겉돌고 있었고, 나아가 권선생이 도법스님을 면전에서 구박하는 느낌까지 들어서 매우 민망하기까지 했었다. 예컨대 이런 구절들이다.

 

"걷는다고 생명이 살아나나요."
"이렇게 걸어다니면 누가 일을 합니까.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일할 농민이 더 필요합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스님처럼 사람들과 만나 얘기할 게 아니라 다소곳이 시골에 내려와 일하면 됩니다. 정 걸어야 한다면 스님 혼자 걸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 되지요."

 

권정생선생의 이런 언술을 보면서 나로선 참으로 갑갑했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남들이 그렇게도 훌륭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이 이 정도의 식견 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 때문에라도 더 실망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한 후배와의 대화 중에 갑자기 이 얘기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그 당시에 좀 찜찜한 기억 때문에라도 마음 속 깊이 남아있던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도법스님에 대한 권선생의 말을 도법에 대한 비판으로 얘기를 끌어가고자 했었는데, 나로선 이런 논조에 마냥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나는 그 대화 도중에 갑자기 간디의 '소금행진'(salt march)이라는 인도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떠올랐다. 즉, 생활필수품인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는 영국이 여기에 소금세까지 부과하자 직접 바닷가에 가서 소금을 생산해오자는 생각으로 390km의 길을 걸어간다. 1930년, 70여명으로 시작된 행진대는 영국 관료와 경찰의 폭력적 대처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6,000여명으로 불어나서 간디와 함께 행진한다. 결국 행진 24일째에 바닷가에 도착하여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내면서 인도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간디의 샤티그라하를 기반으로 인도 국민이 결속하게 되어 인도 독립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권선생의 기준대로라면 간디의 그 행진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도법스님에게 말했듯이, 그런 일은 다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괜찮은걸까...? 그냥 산업 현장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걸까? 비록 간디와 도법의 두 행진의 의미와 위상과 효력이 다를지라도 말이다...

 

사실 그런 의문에 대해 많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정작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권정생이라는 분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도법스님을 치켜올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상대를 존중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그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는 것이 이 시대에는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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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5.11.25 18:06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051125180610103

 

[도법과 걷다] ‘인간국보’ 안동 권정생선생을 찾아

 

소백산맥의 거대한 준령과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분지에 위치한 경북 안동. 안동은 대표적 역사문화 도시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문인 학자들을 배출한 영남사림의 중심지이자 한국 유교문화의 본산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느 지역보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유림 정신과 무관치 않다.

 

↑ 권정생선생이 자신의 토담집 안마당에서 도법스님과 환경과 생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도법스님이 순례단원들과 함께 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토담집을 찾아가고 있다.

 

지난 15일 안동에 들어선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순례 여정도 안동의 무수한 문화유산을 비켜갈 수 없었다. 의성 김씨 집성촌이었던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시작된 탁발순례는 퇴계종택~육사 생가를 거쳐 하회마을, 병산서원, 봉정사, 대원사로 이어졌다.

순례단을 이끌고 있는 도법 스님에게 문화유산은 '역사의 침전물'이 아니다. 당대의 삶과 혼이 배어 있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도법 스님은 지난 20일 안동의 마지막 밤을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보물 182호)에서 유숙했다. 임청각은 본래 99칸집이었으나 일제때 절반 정도로 줄었다. 스님은 안동의 문화유산에서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탄생지입니다. 석주 선생은 유학자이면서도 가족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임청각에서는 그분의 혼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안동 순례 마지막날인 지난 21일. 순례단은 다시 '국보'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유형문화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근대화가 덜된 사람'(염무웅),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신경림)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국보' 권정생 선생(68)이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피재현 시인의 안내를 받아 골목을 따라 가니 마을길이 끊어진 곳에 붉은 슬레이트 지붕의 토담집이 나타났다. 울도 담도 없으니 대문이 있을 리 없다.

순례단의 인기척에 동화작가 권 선생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두툼한 작업복 차림에 털실모자를 쓴 그는 10명이 넘는 순례단 규모(?)에 흠칫 놀라는 듯했다. "스님 혼자서만 오시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신다 했으면 못오시게 했을 텐데." '이 많은 손님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눈치였다. 선생은 "방이 좁아 들어갈 수 없으니 그냥 여기에 앉으세요"라며 마당의 의자를 권한다.

-작년 3월 지리산을 시작으로 전국 탁발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며 생명과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도법스님)

"걸어서 전국을 다닙니까."(권정생 선생)

-많이는 못 걷고요. 하루 15㎞ 정도 걷습니다. 지금까지 대략 6,000㎞를 걸었지요.

"걷는다고 생명이 살아나나요."

-일단 걸으면서 고민하자는 것이지요. 요즘은 인터넷이나 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이 잘 소통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옛날보다 단절이 더 심합니다. 만나서 환경, 생명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걸어다니면 누가 일을 합니까.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일할 농민이 더 필요합니다."

-저도 줄기세포를 만든 황우석 교수보다 농민들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지요. 바로 오늘날의 농촌과 농민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오히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스님처럼 사람들과 만나 얘기할 게 아니라 다소곳이 시골에 내려와 일하면 됩니다. 정 걸어야 한다면 스님 혼자 걸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 되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두 선생님처럼 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게지요. 혼자 어렵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할 일을 모색하는 겁니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처럼 고향에 살면 쫓겨납니다.

"쫓아내도 꿋꿋이 나 여기 살겠다 하면 더이상 어쩌지 못하지요. 저는 위대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훌륭한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마더 테레사 수녀는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있어 훌륭하게 됐지요. 간디는 영국인 침략자들이 만든 것이고. 말없이 착하게 살아야 하지요. 우리 동네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이현주 목사가 찾아왔는데, 그분에게도 허공에 떠도는 말 그만하고 농사지으라고 했어요. 농사질 힘이 없으면 마당에 텃밭이라도 가꾸라고."

-선생님 말씀대로 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곳 중의 하나가 절집입니다. 그런데 그속을 들여다보면 조작이나 허위의식이 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만 말을 만들어요.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말하셨어요. '저 뜨거운 태양 속에 있는 감이 언제 뜨겁다고 하더냐'고. 어머님도 평생 덥다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방은 따뜻하십니까.

"당연히 춥지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게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농사짓는 얘기에 이어 골프장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에 이르러서는 권선생은 목소리를 높였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골프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골프장 건설을 막지 못한 안동시민들을 더이상 보기 싫다"고 말했다.

한때 교회 종지기 생활을 하며 신앙에 몰두했던 권선생과 스님은 종교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사는 방식이나 철학에서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대화 중 농촌과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피폐화되는 농촌을 안타까워했다. 권선생은 "15년 전만 하더라도 집앞 개울에서 송사리가 살고 건너편 산에는 수달이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고 전했다.

생전 처음 만난다는 두 사람. 자연과 생명과 삶과 인간에 대해 두루두루 끝없는 얘기를 풀어냈다.

〈안동|글 조운찬·사진 권호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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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집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도법 스님과 대화를 나눈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많은 이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했다. 순례단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다"며 순례단에게도 다시 찾아오지 말 것을 여러차례 부탁했다. "사람들과 만나 떠들고 나면 폐에 무리가 가 며칠씩 고생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성이 파괴된 사회와 환경오염, 이기심을 조장하는 도시 문명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라크 전쟁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석유 때문이 아니냐"면서 "전쟁 반대에 앞서 자가용부터 없애자"고 말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강하게 드러냈다. 권선생은 "청와대, 국회가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데 하는 게 뭐가 있느냐"며 "대통령이 뭘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듣지 않은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장 건설도 못막으면서 무슨 운동을 하느냐"며 환경시민운동 단체에도 화살을 겨누었다. "운동을 하려면 농약 만들지 말고 가루비누 쓰지 말기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40년간 폐결핵을 앓고 있는 노인답지 않게 권선생의 말은 또박또박했고 논리도 정연했다. 외견상 건강도 괜찮아 보였다. 그는 2년 전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이후 병원 출입을 끊고 있다. 그는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걷지 못한 사람에게 '네 스스로 자리를 들고 걸어라'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병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낸다. 사람들과의 접촉이란 마을 사람들과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게 전부다. 최근에는 지인들의 방문까지 거절하는 바람에 찾는 이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에는 순례단원뿐 아니라 이원걸 안동 YWCA 사무총장 등 안동 시민 몇 사람도 동참했다. 취재진은 순례단에 끼여 권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권선생이 언론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린다는 얘기를 듣고 신분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도법 스님은 "자신을 낮추고 소박하게 사는 삶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자기체험과 확신을 잘 보여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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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소금행진(Salt March)

 

 

 

 

1930년 3월 12일. 영국의 소금세 신설에 항의하여 간디는 사바르마티 아쉬람(Sabarmati Ashram near Ahmedabad)에서 390km 떨어진 인도 서부해안 단디(the sea coast near the village of Dandi)를 향해 위대한 걸음을 내딛는다. 인도인의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영국산 소금 40kg당 1루피씩 세금을 부과하자 직접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통 염전을 향해 떠난 것이다. 24일째인 4월 6일 새벽, 단디 해안에 도착한 간디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금 알갱이를 집어든다. 그리고 주전자에 바닷물을 붓고 끓이니 잠시 후 한줌의 소금이 간디의 손바닥에 놓여진다. 출발할 때 70여명이었던 인원이 바닷가에 도착할 때에는 6,000여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이 비폭력 무저항의 힘을 본받은 인도인의 마음은 하나로 뭉쳐져 인도 독립의 씨앗이 되었다.

 

이 소금투쟁은 단순히 조미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항거요, 불의와 폭력에 대한 장엄한 선전포고였다. 간디와 그 아들이 체포되고 무려 6만 여명이 재판에 넘겨진 후에도 인도인들의 소금생산은 계속되었다. 비록 한 줌씩에 불과한 소금이었지만, 그 작은 소금이 지닌 힘은 제국주의의 무력보다 강했다. 그 날 이후, 인도의 모든 해변은 인도인들 자신의 소금생산장으로 돌아온다. 영국인들로부터 ‘소금도둑 salt thief’이라는 불명예를 얻은 간디는 인도인들이 시성 詩聖으로 숭앙하는 타골 Rabindranath Tagore로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 Mahatma라는 칭호를 헌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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