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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7년05월03일 제658호

http://www.hani.co.kr/section-021150000/2007/05/021150000200705030658027.html

 

 

 

 

귀향, 광기, 침묵… 그 뒤

송두율 교수가 독일로 돌아간 뒤 2년 반 만에 펴낸 <미완의 귀향, 그 이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정전체제하에서 우리 남한을 대화의 상대로서 불인정함에 따라, 남북 간의 우발적 군사 충돌이 대규모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정전협정의 유지를 담당할 대체적 조절이 이루어져서 한반도에 평화상태가 구축될 때까지 현 정전협정 체제가 유지되고, 유엔사의 위상과 역할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반적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사안임에도….”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의 주인공

 


△ ‘빨갱이,거물 간첩,가짜 교수…’지난 2003년 10월22일 밤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송두율 교수가 착잡한 표정으로 검찰 수사관에 이끌려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사회를 옥죄고 있는 ‘국가보안법 체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줬다.(사진/한겨레 김종수 기자)

지난 4월9일 검찰이 법원에 청구해 발부받은 이시우(39·본명 이승구)씨의 체포영장 내용 가운데 일부다. 모두 20쪽으로 이뤄진 이 영장에서 검찰은 이씨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념, 자유민주통일 노선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서” 이적표현물 반포와 군사기밀 누설, 이적단체 구성원과의 회합·통신 등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를 했다고 적고 있다. 영장에 따라 서울경찰청 보안과는 4월19일 이씨를 체포했고, 남북이 평양에서 제13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종결회의를 열어 경의선·동해선 시험운행과 대북 쌀 40만t 지원에 합의한 4월22일 법원은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을 훑어보면, 공안당국은 사진작가이자 독립 언론인인 이씨가 그동안 해온 각종 취재·보도 활동의 목적을 ‘유엔사 해체’로 몰아가는 모양새다. 미 국방부가 비밀 해제해 공개한 옛 문서와 국내외 미군시설을 취재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와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도한 내용은 손쉽게 ‘군사기밀 누설’이 됐다. 이씨가 지난 2005년 10월 독일을 방문해 주독 미군기지 관련 자료를 수집한 것조차 ‘유엔사 해체를 목적으로’ 한 일로 꼽혔다. 하지만 여느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과 마찬가지로 공안당국은 이번에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반적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사안’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바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다.

지난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서 합의한 ‘2·13 합의’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와 함께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게 ‘유엔사 해체’ 문제다. 북핵 폐기와 함께 한국전 종전 선언에 이어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 체제로 이행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정전체제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사는 그 존재 이유가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종전 선언 이후 유엔사 처리 방향을 놓고 정부 안팎에서도 논의가 활발하다. 이씨의 구속이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과 3년여 전에도 우리 사회는 국가보안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여론몰이로 한 지식인에게 온갖 뭇매를 퍼부어댔다. ‘마녀사냥’과 다름없던, 그때의 일을 기억해보자.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불린 송두율 교수 사건 말이다. 진보적 지식인의 표상처럼 여겨졌던 그는 귀국과 함께 ‘빨갱이’ ‘거물 간첩’ ‘가짜 교수’로 몰렸다. 그의 귀국을 주선했던 이들과 단체조차 ‘이런 줄 몰랐다’ ‘나는 관련 없다’고 거리두기에 골몰했다. 송 교수에겐 ‘반성’을, 정부엔 ‘용서’를 촉구하고 나선 이들도 있었다. 질풍노도의 나날이었다.

 

2004년 여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쫓기듯 독일로 돌아간 이후, 2년 반여의 침묵을 깨고 송 교수가 새 책을 내놨다. <미완의 귀향, 그 이후>(후마니타스 펴냄·이하 미완의 귀향)는 2002년 출간된 <경계인의 사색>(한겨레신문사 펴냄) 이후 5년여의 공백 끝에 나온 책이다. 독일로 돌아간 뒤 국내에 발표한 글을 새로 묶고, ‘그리던 고향’에서 겪었던 1년 남짓의 경험담을 보탠 이 책은 1988년 펴낸 <계몽과 해방>(한길사 펴냄) 이후 그의 11번째 단독 저서다. 송 교수는 책을 펴내게 된 사연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국 사회가 먼저 답했어야 할 문제

 

“…여전히 많은 사람이 내게 갖고 있는 의문과 편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대책 없이 어떻게 입국하게 되었나?’ ‘왜 미리 문제가 될 만한 사실을 밝히고 들어오지 않았나?’ ‘잘못이 없다면 왜 언론을 통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국적 포기까지 약속했나?’ ‘왜 국가보안법에 맞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독일로 돌아가버렸나?’ 등.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변명처럼 이해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한 의문과 편견은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내가 말하기 전에 한국 사회가 먼저 대답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한국 사회 안에서 아무도 이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가 ‘귀향’한 때부터 그가 다시 고국을 떠나야 했던 때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던 우리 사회는, 그의 부재와 함께 총체적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2004년 겨울을 달군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열기 속에서도 그의 이름 석 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인 극우세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우군이어야 할 진보·개혁 세력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닫았다. 무엇이 이토록 철저한 ‘망각’과 ‘침묵’을 부른 걸까?

 


 

‘사람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고한다’는 말이 있다. 한 사회의 사고체계에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는 지배 이데올로기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을 일컬어 ‘헤게모니’라고 표현했다. 해방기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 1948년 12월1일 제정된 이후 59년 세월 동안 국가보안법은 분명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로 자리를 잡아왔다. 국가보안법을 유지·온전하려는 진영은 물론 국가보안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까지 국가보안법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람시는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분명 성공한 헤게모니일 터다. 군사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세 차례 잇따라 들어선 민간 정부도 국가보안법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일개 법률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제도·사회관계·관념의 조직망’ 속에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낸 국가보안법 체제의 힘이다. 책을 펴낸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이렇게 지적한다.

 

국가보안법의 힘이 ‘체제 모순’을 가려

 

“국가보안법은 애초 한시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결합하고,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면서 신념체계로 조직화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장악한 헤게모니로 성장했다. 장기간 국가보안법의 헤게모니가 유지되다 보니, 억압당하는 쪽에서조차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법률적 영역에선 폐지를 말하면서도, 헤게모니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도덕성’이니 ‘개인의 실수’니 ‘지식인의 양심’ 따위의 ‘옷’을 입고 나타난 국가보안법의 힘이 ‘체제 모순’을 가려버렸다.”

 

박 주간은 “책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책 말미에 실린 송 교수와의 ‘대담’이 문제였다. 송 교수의 ‘미완의 귀향’은 당대 한국 사회가 경험했던 ‘집단적 기억’이었지만, 여전히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탓일 게다. 송 교수 스스로도 “때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치는 못해도 어느 시점에서 중간평가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절박한 느낌”이 송 교수를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미완의 귀향>은 어쩌면 송 교수의 귀향을 둘러싼 논쟁이 ‘미완성’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사건을 다룬 백서가 발간되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이 있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다. 그때까지 ‘경계인’ 송두율의 발언도 멈추지 않고 계속돼야 하리라. 송 교수는 2004년 3월9일 1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경계인’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섯 마리 원숭이 우화를 생각하다

 

“37년 만에 ‘경계인’으로서 제 조국 땅을 밟으면서, 저는 조직사회학에서 종종 거론되는 다섯 마리 원숭이에 대한 우화를 생각했습니다. 원숭이 사육사가 매일 아침 나무 꼭대기에 신선한 바나나를 매달고, 그 근처에 전류를 통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먹으려고 나무에 오르다가 흐르는 강한 전기에 놀라 곧 포기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원숭이도 흐르는 강한 전기에 놀라 연이어 포기했습니다. 이튿날 새롭게 우리 안에 들어온 다섯 번째 원숭이가 걸려 있는 바나나를 보고 나무에 오르려고 하자 이미 혼난 경험이 있는 네 마리 원숭이가 다 나서서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원숭이는 이 만류를 뿌리쳤습니다. 사육사가 이미 전류를 끊었는데도 네 마리 원숭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민주화됐다는 ‘착각’을 확인해줬다”

 

송 교수 사건 2심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받은 송호창 변호사 인터뷰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송호창 변호사

송두율 교수가 다시 독일로 떠난 지 2년8개월여가 흘렀지만, 그의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심 판결에 불복한 검찰 쪽의 상고로 사건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기 때문이다. 당시 송 교수 사건 변호를 맡았던 송호창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법이 정한 원칙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18일 오후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나 재판 과정에 얽힌 뒷얘기를 들어봤다.

 

송 교수 사건을 돌아본다면?

=법이 정한 원칙과 법률가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실감한 사건이었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 낙후된 법 집행과 수사 관행으로 얼마나 어려워질 수 있는지도 절감했다.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져야 하는데, 이 사건은 이미 법정에 서기 전 사회적 재판, 여론재판으로 판결이 난 상태였다.(불법 행위인)‘피의사실 공표’가 국가기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2심에 와서야 상당 부분 정정·번복할 수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았는데.

=재판부에서도 ‘형사소송법을 새로 쓸 만한 법리적 쟁점이 다 들어 있는 사건’이라고 했다. 예비판사 교육을 나온 사법연수원생들에게 법원에서 방청을 권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까지 형사재판이 법이 정한 절차가 아니라 관행에 따라 편의적으로 이뤄진 게다. 변호인단은 재판 과정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법적으로 따지고, 법전을 들고 다니면서 피고인 방어권 행사를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살아 있는 형사소송법 교과서의 원형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재판에 앞서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는 변호인 접견조차 못하게 했고, 심문에 참여해 직접 조력하는 건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피고인 심문 과정에서 곁에 앉아 직접 방어권을 행사하거나, 검찰 조사에서도 조언한 뒤 답변하도록 했고, 호송·조사 중 계구 사용이나 피고인의 공판정 좌석 배치에 관한 규정까지 따지고 들었다. 필요하면 (재판 절차와 관련한 별도의) 소송을 내기도 했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당시 사건 담당 검사를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2심에서 판결을 미리 예상했나?

=1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사안이 많았는데,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한 반박 증거를 구성하고, 수사 및 재판 과정을 검토하면서 핵심 쟁점은 두 가지로 모아졌다. 간첩 혐의와 국가기밀 누설 혐의였는데, 무죄 판결이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빠지니까 나머지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결국 학술대회 참가를 위한 방북만 문제가 되고 나머지 쟁점은 모두 사라졌다. 2심 재판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진행됐고, 나와 다른 변호사 1명은 핵심 쟁점에서 무죄가 나올 것으로 내다봤다.

 

집행유예 선고가 나온 뒤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아는데.

=(웃음) 형사소송에서 주요 사건은 (재판장이) 판결 요지를 낭독하는데, 유죄인 경우엔 피고인에게 선처할 사항을 먼저 얘기한 뒤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게 보통이다. 무죄인 경우엔 그 반대다.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이 ‘죄책이 무겁다’는 말부터 하기에, ‘아, 무죄가 나왔구나’ 하고 직감했다. 지난 1년여의 과정이 떠오르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 얼굴도 보게 되고, 안타깝기도 하고 감정이 북받쳤다.

 

송 교수가 귀국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을까?

=귀국해서 더 잘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의 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니까. 물론 송 교수 개인의 입장에선 되돌릴 수 있다면 안 들어오는 게 나았을 게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판적 인식’을 가진 지식인 사회, ‘개혁정권’이란 정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어차피 다른 계기로라도 그런 문제점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송 교수 사건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됐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라는 점을 확인해줬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지만, 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해준 것 같다. 문제의식 자체가 ‘나이브’하다는 것도 확인해줬다. 여러 부류의 사람이 많았는데, 일부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송 교수 사건을 이용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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